배창호라는 이름은 충무로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읽혀왔다. 누군가에게는 대중성을 만발시킨 흥행사이고 누군가에게는 영화적 실험을 서슴지 않는 구도자로 기억된다. 실제로 배창호 감독은 그런 존재였다. 한때 스스로 스타 반열에 올랐던 한국영화 산업의 아이콘이었지만, 대중영화 시스템 안에서 과감한 실험 정신을 투여하며 자본으로부터 삐딱한 시선을 받았고, 그 뒤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를 거의 맨손으로 직접 만드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변모했다. 이런 경우는 최소한 한국영화계에서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연로해지면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자본과 관객 탓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중단하는 것과 달리 배창호 감독은 길을 스스로 열어가면서 추구하는 바를 굽히지 않고 실현해 왔다.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공동 주최하는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는 40여 년의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온 배창호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망하는 자리다.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 업>과 그동안 디지털로 복원되지 않았거나 디지털 복원이 되었음에도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았던 영화 3편을 상영한다. 관동대 교수이기도 한 박장춘 감독과 배창호 감독이 공동 연출한 <배창호의 클로즈 업>은 배창호 감독이 만들었던 영화의 공간들을 따라가며 그의 영화 세계를 돌아본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 제작 관련 비화뿐 아니라 배창호 감독의 예술관까지 담겨있는 일종의 에세이 영화이기도 하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는 이번 특별전을 위해 4K 디지털 복원된 버전으로 상영된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를 잃은 자매가 헤어진 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을 담는 이 영화는 전쟁의 참상과 형제애의 오묘함을 담아낸다. 언니 수지 역의 유지인과 동생 수인 역을 맡은 이미숙의 연기가 가슴을 울린다.
<황진이>(1986)는 배창호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다. 흥행성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숏을 롱테이크로 담아내 미학적으로는 높은 평가를 얻었지만 대중으로부터는 거센 외면을 받았다. <배창호의 클로즈 업>에서 배창호 감독은 <황진이>에서 치중한 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고 말하지만 이후 그의 영화는 서서히 작가적 성향을 갖게 된다.
춘원 이광수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꿈>(1990)은 <황진이> 이후 추구해 온 실험 정신이 기존 대중성과 잘 결합된 영화다. 통일신라 시대룰 배경으로 조신이라는 스님과 그에게 겁탈당한 달례가 인생의 나락으로 향하는 이야기로, 불행히도 막바지의 ‘반전'에 많은 관객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꿈>은 제목처럼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로 가득한 배창호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다.
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이들 영화 상영뿐 아니라 배창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준비돼 있다. 부디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 (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