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경쟁 부문의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으로는 LGBTQ 성향 영화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과 여성 연대극을 내포한 유사가족 드라마가 다수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동안 LGBTQ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 독립 장편 극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올해의 경우 경쟁 부문에 진출하지 못한 여러 편 또한 LGBTQ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되는 LGBTQ 소재 영화로는 <3670>과 <여름의 카메라>가 있다. 박준호 감독의 <3670>은 한국 사회의 초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 탈북 게이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철준이 탈북자 커뮤니티와 동성애 커뮤니티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함께 영준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멜로영화다. 성스러운 감독의 <여름의 카메라>는 여름이라는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로, 학교 동료인 연우에게 느끼는 설레는 감정과 아빠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엮어놓은 상큼한 성장영화다. 어둡고 우울한 느낌이 강했던 그동안 LGBTQ 영화와 달리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유사가족 이야기는 영화제의 단골 메뉴이긴 하지만, 올해의 경우 여성 연대극과 결합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미투 사건 이후 전주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와 주류 영화계에서도 선보였던 여성영화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선 방미리 감독의 <생명의 은인>은 보육원 퇴소를 앞둔 세정이라는 소녀를 앞세운다.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살아가는 세정은 어릴 적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하는 중년 여성 은숙을 만나게 되고 함께 사기 당한 전세 보증금을 받기 위한 길에 나서게 된다. 이은정 감독의 <숨비소리>에서 연대하는 이는 한 가족 3대의 여성들이다. 서울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20대 여성과 그의 어머니, 할머니가 함께 엮어가는 질박한 삶의 이야기다. 윤심경 감독의 <캐리어를 끄는 소녀>도 좀 느슨하긴 하지만 여성 연대극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양부모에 버려진 15살 소녀 영선이 엄청난 부잣집 딸 수아의 테니스 코치를 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데, 영선은 수아의 엄마 지영과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된다.
올해 한국경쟁 진출작에는 그야말로 배우들의 넘치는 힘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다. <97 혜자, 표류기>와 <그래도, 사랑해.>가 그러한 영화들인데, 두 작품 모두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각자의 연기력뿐 아니라 서로의 합마저 뛰어난 배우들의 앙상블이 주목을 끈다. 정기혁 감독의 <97 혜자, 표류기>의 중심 인물은 서울의 보험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혜자로, 그는 '부산 상여자'답게 거친 성격을 갖고 있어 고객과 문제를 자꾸 일으킨다. 이 영화는 서울 오피스텔에서 거주하기 위해 고향인 부산을 찾은 혜자가 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과정을 그리는 로드무비로, 거칠지만 힘 있는 드라마를 선사한다. 연극계를 배경으로 하는 김준석 감독의 <그래도, 사랑해.>는 연극 배우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예술과 삶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느라 한동안 일을 쉬었다가 다시 연기를 시작하려는 소라와 연기에 대한 욕심이 있지만 이를 노골적으로 겉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남편 준석의 웃픈 현실이 넉넉한 유머 속에서 펼쳐진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처럼 특정 경향으로 묶이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빛>과 <아방>도 관심을 둘 만하다. 조현서 감독의 <겨울의 빛> 속 주인공은 고등학생 남자아이 다빈으로, 가족의 형편과 미래에 대한 의문 탓에 학교 바깥으로 삐져 나가려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나란히 해외 교류 연수 프로그램에 가는 것이 유일한 꿈인 그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현실은 점점 어려워진다. 김태윤 감독의 <아방>에서 주인공은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이주하려는 청년 윤이다. 서울행 채비를 다 마쳐가는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윤은 제주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실체를 짜맞추게 된다.
한편, 올해 한국경쟁에 진출한 다큐멘터리는 한 편뿐이다. 소재나 만듦새가 나쁘지 않은 다큐멘터리가 많았지만 다소 상투적인 내러티브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소재를 잘 부각시키지 못하는 작품도 있었다. 이은희 감독의 <무색무취>는 소재와 만듦새가 모두 완성도 높은 영화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에서 빈번하게 나타나온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은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돼왔다. 이 영화는 이 같은 재해 피해 노동자들의 업무 기록과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사회현상 저변에 자리한 문제를 짚어나간다. (문석)